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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삼국의 무역을 주도한 장보고

기사승인 2017.12.04  11:2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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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보고의 출생과 관련해 잘 알려진 것이 없지만 고향은 청해진이 설치된 완도 근처의 어느 섬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분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평민인 그는 자신의 역량이 있어도 신분 상승이 되지 않는 현실을 깨닫고 신분 상승에 개방적인 당나라로 향했다.

 당나라에서 지내면서 그는 무령군 소장이라는 군직에 올랐다. 군직을 이행하던 도중 신라인을 대상으로 한 노예무역을 목격한 장보고는 828년 신라로 귀국하면서 흥덕왕에게 “중국을 돌아보니 신라인으로 도적들에게 잡혀와 노비가 된 사람이 많아 청해에 진영을 설치해 도적들이 사람들을 붙잡아가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간청한다. 이에 흥덕왕은 그를 청해진 대사로 삼고 군사 1만 명을 줬다.

 장보고는 군사를 이끌고 중국과 일본 해로의 요해처인 청해에 진을 설치하고 가리포에 성을 쌓아 항만을 보수하고 전략적 거점을 마련했다. 또한 군사들과 함께 선박을 만들고 군사훈련을 하며 황해를 비롯한 해상을 안정시키고 당과 일본을 잇는 중계무역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청해진을 중심으로 재일신라인 사회와 재당신라인 사회를 연결하는 무역망을 구축했고 이들 사이의 중계무역을 하면서 부를 축적했다. 당시 국가적 무역인 조공무역과는 달리 장보고가 실시한 무역은 당나라와 신라, 일본 등 삼국에서 국가조직과 별도로 움직이는 독립 무역선단이었다.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 서남 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한 그는 동방무역의 패권을 잡게 됐다.

 한편 이러한 업적과는 달리 장보고는 정치적 야망이 있었다. 남북국시대의 왕위 계승 다툼에서 패배한 김우징이 837년 청해진으로 들어오면서 장보고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이에 김우징은 45대 신무왕이 된다. 그러나 신무왕은 왕위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죽고 그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이 문성왕이 되었다. 반란을 성공시켜 감의 군사라는 벼슬자리에 오른 장보고는 큰 힘을 갖게 되고 더욱 큰 힘을 갖기 위해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아내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조정과 군신들의 반대로 결혼이 성사되지 않자 반란을 꾀했다. 반란을 도모하던 도중 장보고는 문성왕 8년(846)에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의 칼에 맞아 죽었다.

 역사적으로는 그가 세운 업적에 더욱 많은 관심을 둔다. 완도 앞에 있는 작은 섬 장도를 중심으로 그에 인접한 장좌리·대야리 죽청리 일대에는 수십 척의 배가 드나들던 부두시설·토성·우물터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9세기 당대 최고의 국제무역항이 있던 흔적들이다. 결국 청해진은 중계무역의 장으로서 서남 해로의 요해처 구실을 한 것이다. 무역에 있어서 그는 뛰어난 전략가였지만 무조건적으로 칭송하기보다는 인간으로서 그를 다시 평가해봐야 할 것이다.

정현빈 기자 gc5994@daum.net

<저작권자 © 가천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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